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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 하나 소외되지 않은 다양한 사람과 문화가 공존하는 도시에서 디자인 행사를 풀어나가는 법

다양성이 일상 속에 스며들어 있는 도시, 방콕. 불교도가 92%를 차지하는 환경 안에서 무슬림 공동체를 이루며 살아가는 마을, 시각 장애인을 위한 체육시설을 당사자의 눈높이로 소개하는 파빌리온, 길고양이 이슈를 유쾌하고 직설적으로 풀어낸 전시를 통해 방콕이 ‘다양성’을 풀어내는 방법을 확인할 수 있어요. 방콕디자인위크 두 번째 키워드는 ‘다양성’입니다.

by 노성일
2024.05.22

불교 친화적 도시에서 살아가는 무슬림 공동체를 위한 디자인

태국을 소개할 때, 높게 솟은 불교 사원과 탑의 이미지가 항상 등장한다. 불교도가 인구의 92%로 다수를 차지해 불교의 도시로 인식된 것이 사실이나, 거대 도시 방콕은 훨씬 다양한 종교를 품고 살아가고 있다. 

‘태국 실크 왕(Thai Silk King)’으로 알려진 짐 톰슨 하우스 Jim Thompson House에 인접한 수로 북쪽에 반 크루아 Ban Krua 무슬림 공동체가 있다. 불교 친화적인 도시에서 살아가는 무슬림들은 그들의 문화를 지키고 살기 쉽지 않은 것도 사실. 할랄 푸드를 파는 식당, 기도할 공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하기 때문이다. 이 마을에서는 모스크를 중심으로 이슬람 문화를 정착시킬 수 있는 디자인 프로젝트를 행사 전부터 시작해 그 결과물을 BKKDW 기간 동안 모스크 마당에 전시했다.

(위) 반 크루아 무슬림 공동체의 모스크, (아래) 모스크 마당에 설치된 안내 부스에 이슬람 전통 양식에서 따온 패턴으로 BAN KRUA 글자를 꾸며놓았다. ⓒSungil Noh 

무슬림공동체 커뮤니티 디자인 프로젝트 (출처 : BKKDW 홈페이지) 

여러 프로젝트 중에서 눈에 띄었던 부분은 무슬림과 비무슬림 이웃의 접촉을 늘려주는 공용 공간의 확보였다. 수로가 보이는 마을 어귀에 전통 가옥 양식의 정자를, 모스크 앞 거리에 벤치를 만들어 이웃들이 오가며 나누는 소소한 담소 속에서 관계를 쌓을 수 있도록 했다. 행사 중에는 비무슬림 주민들과 할랄 푸드를 만들어 나눠 먹는 요리 워크숍, 아랍어를 배우는 프로그램 등을 열어 서로의 문화적 이해의 폭을 넓히고 한 공간에서 삶을 나누는 지역 공동체의 상생 방안을 제안하는 시간을 가졌다. 또한 마을 사람들이 오가는 어두컴컴한 다리 밑이나 골목 담장에 주민들의 생활상, 문화에 대한 벽화를 그려 이슬람 공동체의 아이덴티티를 표현했다.

이처럼 커뮤니티의 대다수가 뚜렷한 지향성을 보일 때 그 안에서 다른 의견을 품은 소수의 목소리를 어떻게 듣고 반영할 것인지를 이 프로젝트는 지극히 평범한 관점에서 풀어 보여준다. 마주치면 인사를 나누며, 앉아서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다가 밥을 나눠 먹기도 하는 그런 아주 사소한 일들에서 녹아들어 서로를 이해하게 되는 일상을 담은 기획이었다.  

(왼쪽) 마을 어귀에 설치된 주민들의 수변 쉼터, (오른쪽) 다리 밑에 지역민들의 생활상을 벽화로 그려 넣었다. ⓒSungil Noh

보이지 않는 사람들을 위한 체육시설 홍보하기 

방콕의 풍부한 다양성 속에서도 여전히 배려되지 않는 사람들이 있지 않을까? 올드타운의 롬마니낫 Rommaninat 공원은 오래된 감옥 부지를 체육공원으로 재단장한 곳이다. 평일 낮임에도 운동하는 사람들을 발견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이곳에서 ‘Livable Scape… for All(모두를 위한 살만한 풍경)’ 이라는 제목의 노란색 파빌리온을 발견했다. 소개 글 첫 문장이 강렬하게 다가왔는데, 이런 내용이었다. “이 글을 읽을 수 있다면, 당신은 우리의 세계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이곳은 아직 지어지지 않은 시각장애인을 위한 체육시설을 소개하고 있었다. 

공원 내 사람들의 왕래가 잦고 잘 보이는 위치에 파빌리온이 설치되어 있었다. ⓒSungil Noh

파빌리온 내부와 부스 사이에 설치된 점자블록 ⓒSungil Noh

정확한 이유는 확인하지 못했으나, 시각장애인을 위한 점자블록은 인도와는 다르게 공원에 잘 설치되지 않는 편이다. 하지만 이 파빌리온 근처에는 점자블록이 특별히 설치되어 소식을 듣고 찾아올 시각장애인들도 편하게 전시를 관람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 

첫 번째 파빌리온의 내부에서 체육시설을 소개하는 영상을 보고 밖으로 나서면 바닥에는 점자블록이 자연스럽게 다음 부스로 길을 안내했다. 노란 점자블록은 시각장애인이든, 비시각장애인이든 선명하게 방향을 알 수 있는 좋은 도구로 쓰였다. 이어진 부스에서는 장애인이든, 비장애인이든 스포츠는 ‘살만한 일상’을 만드는 데 필수적인 부분이라는 사실이 다양한 시각 자료소개와 함께 소개되고 있었다. 시각장애인들이 전시 내용을 촉각으로도 이해할 수 있도록 점자로도 쓰여 있었고, 체육시설의 조감도는 모두 3D 입체 모형으로 제작해 시설을 사용하게 될 당사자들이 새로 생길 공간을 상상할 수 있도록 했다.

체육시설의 3D 입체 조감도 ⓒSungil Noh

전시 내용에 따르면 태국 인구의 5분의 1이 시각 관련 질환을 겪는다고 한다. 아직 지어지지 않은 이 시설이 왜 필요한지를 비장애인들이 공원에서 운동하며 자연스럽게 들러 관심을 가질 수 있도록 한 것이 효과적인 기획이라는 생각이 든다. 

고양이와 도시에서 공존하며 살기 위해 마련한 유쾌한 자리 

태국인들은 고양이를 정말 사랑한다. 골목 어귀나 나무 아래에서 졸고 있는 고양이를 어디서든 볼 수 있다. 하지만 고양이 개체수가 너무 늘어나 최근 들어 큰 골치를 앓고 있다. 이 이슈를 해결하기 위해 BKKDW 동안 포창 예술학교(Pohchang Academy of Arts)에서 ‘캣사노바 Catsanova 2024’라는 재미있는 행사가 진행되었다. 바람둥이라는 뜻의 카사노바가 떠오르는 이 이벤트는 길고양이 개체수를 늘리는 주범인 수컷 고양이의 중성화 진행을 위한 모금 프로젝트다.  

캣사노바 2024 전시장 풍경. 삼삼오오 즐겁게 ‘땅콩 작품'을 그리거나 감상하고 있었다. ⓒSungil Noh 

전시장 안에서 들어서면, 거대한 ‘땅콩’, 즉 수컷 고양이의 고환을 상징하는 구조물로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킨다. 이곳의 대부분 설치물도 TCDC에서처럼 건축용 비계로 만들어 BKKDW의 이미지의 일관성을 부여했다. 벽면에는 개성 넘치는 그림들이 전시되어 있고, 구조물 사이사이에 집중해서 그림을 그리고 있는 모습이 포착되었다. 그림 그리는 워크숍에 참여하고 싶은 사람들은 1인당 300바트(한화로 약 1만 2천원)를 지불하고 참여해 땅콩 모양의 석고 조형물이 붙어 있는 작은 캔버스 위에 그림을 그려 완성된 그림은 경매에 출품하는 방식이었다. 경매 시작가 350바트를 내고 전시장 벽면에 작품을 전시해두면, 행사 기간 동안 이곳을 찾아오는 사람들 누구나 한 장에 50바트를 의미하는 스티커를 작품에 붙여 경매에 참여할 수 있다. 행사가 마치면 최후로 참여한 사람이 작품을 낙찰받게 된다. 경매로 모인 수익금은 모두 수컷 고양이의 중성화에 쓰인다고. 다소 딱딱하고 심각해질 수 있는 길냥이 이슈를 부드럽고 재미있는 활동을 통해 중성화에 대한 공감대는 물론, 비용까지 충당했다. 게다가 참여자는 원하는 작품을 소장하게 되는, 모두가 윈윈하는 기획이란 생각이 들었다. 도시의 이슈에 접근하는 태국 사람들의 재치가 돋보이는 프로젝트다.

경매 중인 땅콩 작품들. 경매는 350바트부터 시작해 스티커 한 장당 50바트씩 올라가는 구조다. 중성화 수술에는 한 마리당 500바트가 든다고 한다. 스티커가 26개 붙은 오른쪽 작품은 벌써 세 마리의 중성화 수술비 모금이 달성된 상태였다. ⓒSungil Noh 

(왼쪽)작품 참여 안내문, (오른쪽) 경매 안내문  “입찰에 책임을 다하길 거부하신다면, 고양이가 당신을 미워하길 기원합니다.”(경매 안내문의 6번 항목) ⓒSungil Noh 

비계구조물을 활용한 땅콩을 형상화한 작품 설치 디테일 ⓒSungil Noh

이 프로그램을 보면서 ‘과연 우리나라에서는 이런 시도할 수 있을까?’ 하는 질문이 먼저 떠올랐다. 길고양이 중성화를 반대하는 사람도 있고, 고양이 급식을 반대하는 의견도 있는 등 동물을 바라보는 워낙 다양한 관점이 존재해서 걱정과 함께 실행에 옮기기 쉽지 않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타겟 지역 혹은 커뮤니티가 내 기획을 어느 선까지를 유쾌하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내 생각과 다른 의견을 마주했을 때 얼마나 수용할 수 있는 여유가 있을까? 기획자라면 이 부분을 주의 깊게 살피는 것이 당연하겠지만, 그러다 보면 많은 기준 속에 기획의 빛나는 부분, 핵심을 놓치지 않을까 걱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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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련된 Rivercity Gallery와 바쁜 방콕 꽃시장 모두에서 다층적인 전시가 열렸다. ⓒSungil Noh

수평적인 부분이 다양성이라면, 수직적인 부분이 다층적인 부분이다. 방콕은 다양성, 다층성이 공존하는 도시다. 방콕 곳곳에 있는 BKKDW 공간을 둘러보며 놀라웠던 점은 찾아올 사람들의 선호에 따라서 매우 세련된 아트 갤러리에서부터 아주 작은 용접소까지 정말 다양한 층위의 공간이 딱 잘 어울리게 큐레이팅 되었다는 점이었다. 치열한 삶이 꾸려지는 꽃시장에 무심한 듯 설치된 작품이나 태국에서 가장 유명한 명품 쇼핑몰 중간에 누구나 찾아와 쉽게 볼 수 있게 설치된 미술작품도 그러했다. 시민의 다양한 삶을 다각도로 조명하고자 하는 섬세함이 묻어났다. 태국은 젠더, 종교, 인종과 민족 등 다양한 배경의 사람들이 한 데 어울려 지내는 것이 익숙한 도시다. 그렇게 몸에 밴 다양성으로 펼쳐낸 프로그램도 그만큼 다채로움을 품고 있었다. 

 
노성일
에디터 노성일

출판사 소장각을 운영하는 그래픽 디자이너이자 동남아시아 시각 문화 연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