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에겐 확신이 필요했다
‘경험’과 ‘인증’이 시대의 키워드가 되면서 북페어는 출판사와 독자가 만나는 가장 확실한 접점이 되었다. 그래서 우리도 지금껏 10년 정도 출판사를 운영하면서 여러 도서전의 문을 두드렸다. 하지만 도서전에서 ‘논픽션을 좋아하는 독자’들을 특정해 만나기는 쉽지 않았다. 주제가 명확한 도서전에서는 관심 가지고 봐 주는 사람들이 있었지만, 대부분의 작은 도서전에는 개인 창작자들이 훨씬 많았고 그곳에서 과학책은 외계의 별만큼이나 낯선 존재였다.
그럴 때마다 우리가 만드는 책이 매력이 없나 싶어 좌절감에 허덕였다. 세상이라는 호수에 작은 돌멩이 하나 던지는 마음으로 사고에 균열을 내겠다는 거창한 포부 앞에 선 내가 초라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오늘 왔던 부스 중에 제일 재미있었다.” “도서전 다녀와서 가장 기억에 남는 부스였다.”라는 말을 여러 관람객에게서 들을 만큼 나는 대면형 책 소개에 강했다. 자기가 만든 책에 대해서 소개하는 데 이렇게나 목마른 편집자가 있었다. 자리가 필요했다. ‘독립출판물이나 아트북을 위한 페어는 있는데, 이런 텍스트가 이질적으로 느껴지지 않는 곳은 왜 없을까?’ 우리가 독자를 붙잡기 위해 필요한 것은 기존의 문법과는 다른 무대라는 생각에 이르렀다. 그래서 다른 장르는 제외하고 오로지 인문 교양 논픽션만 취급하는 자리를 만들기로 결심했다. 굿즈도, 저자 북토크도 없이 오로지 책만.
디스이즈텍스트는 잘 팔리지는 않지만 우리 사회에 소개해야 하는 책을 뚝심 있게 만들어 온 논픽션 출판사들을 한 자리에 모아, “세상에 이런 출판사와 이런 책이 있습니다”라고 선보이는 자리였다.

이곳에서 꼭 하고 싶습니다
알라딘빌딩 1층 접견실은 평소 출판사 마케터들이 서점MD들에게 신간을 소개하는 곳으로, 책에 대해 수많은 이야기가 오가는 공간이다. 왜인지 모르겠지만 이 공간에서 우리가 소화할 수 있는 규모의 북페어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도서 팀장님에게 제안 메일을 보냈다. 하지만 결과는 거절. 공간이 북페어를 치르기에는 너무 협소하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인디자인으로) 도면을 그려 밀접도를 계산하고, 공간에 수용할 수 있는 인원을 통제하기 위해 다년간의 덕질 경험으로 쌓인 노하우를 이용해 시간제 북페어라는 새로운 개념을 도입하기로 했다. 각고의 노력 끝에 알라딘 접견실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이제 문제는 테이블이었다. 원래는 알라딘 접견실에 비치된 강연용 책상을 이용할 예정이었다. 다소 아쉬운 점은 보통 책상 사이즈보다 작은 120*45mm 규격의 테이블이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사이드테이블을 옆에 하나 더 놓아 180*45로 쓰거나 ㄱ자로 꺾고 천으로 덮어 사용하려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테이블 색상도 흰색과 연두색으로 서로 달랐고, 강연장에 놓인 의자도 너무 사무용 의자여서 공간의 분위기를 잡는 것이 쉽지 않게 느껴졌다.

그때 만난 한칸
북페어를 준비한다는 소식을 들은 지인이 “이런 곳이 있다”며 한칸을 소개해 주었다. 기획 초반에 연락해 보려고 했지만 예산이 부족해 선뜻 연락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기사를 보고 좋은 취지의 북페어라며 먼저 연락을 주셨다. 돌이켜보면 디스이즈텍스트의 좋은 관객 경험은 한칸과 함께했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생각을 할 수 밖에 없다. 참가 출판사와 독자 사이에 놓인 북페어 키트, 그리고 공간 중간중간에 놓인 한칸의 전시 기물들은 전시 공간의 차분한(미색, 검정색, 나무색) 톤앤매너를 완성하는 기능을 했을 뿐 아니라, 전반적인 공간 경험을 높여주는 중요한 장치로 작동했다.

공간의 대부분의 면에는 크게 창이 나 있거나 책장이 놓여 있어서 특별히 손을 대지 않아도 되었으나, 일부분은 시선을 가려야 했다. 진입로에는 도서전으로 들어오는 분위기를 내기 위해 DP Friends_Box1를 설치하고 참가사 대표 도서 1종씩을 진열했다. 들어오면서부터 ‘이것은 책이다’라는 느낌을 확 주고 싶었는데 결과적으로 매우 성공적이었다.

또한 콘솔과 사무국의 짐을 둔 곳을 가리기 위해 DP Friends_ WallZ를 설치하고 디스이즈텍스트를 위해 제작된 플레이리스트가 있는 현수막을 부착했다.

또한 굿즈가 없어 관람객들이 남길 것이 부족하지 않을까 싶어 바깥에 포토월을 배치했는데, Walls 1개를 바깥 마당에 배치하여 포토월로 사용할 수 있도록 했다.
기존 북페어의 한계: 굿즈 vs 대화
논픽션이라는 단어는 애초에 포함하는 것이 너무 많다. 세상이 넓은 만큼 주제도 넓고 관심사도 엄청 다양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책을 추천받기 위해서는 대화가 필수다.
모든 장르의 출판사들이 모여 있고 정해지지 않은 시간 동안 부스들을 둘러보도록 설계되어 있는 기존 북페어에서는 뚜렷한 구매 목적이 있는 책이나 굿즈를 구매하기 위해 줄을 서는 것 외에 출판사와의 긴밀한 스킨십으로 이어지기는 다소 어려운 부분이 있었다. 책을 집어드는 데 방문객의 관심사가 중요한 논픽션 출판사들에게는 특히 그랬다. 그래서 우리는 불필요한 인삿말을 생략하고도 바로 책에 대한 이야기로 이어갈 수 있는 대화카드라는 장치를 설계해 독자의 호기심을 끌고, 출판사에게는 대답할 말을 준비할 수 있도록 했다

Bookfair Kit at 디스이즈텍스트
Bookfair Kit는 파는 사람과 사는 사람의 대화가 가장 중요했던 북페어에 너무나 훌륭한 아이템이었다. 특히 테이블이 없으면 계속 서 있어야 해서 힘들고, 낮으면 앉아서 손님을 맞이하게 되어 약간의 뻘쭘함이 느껴지는데 Bookfair Kit는 관람객과 눈높이를 맞출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다는 것이 너무나 매력적이었다. 게다가 디스이즈텍스트는 중간에 공간 정비 겸 편집자들의 외향력 충전을 위한 쉬는 시간을 배치했기 때문에 굳이 70분 사이에 앉아서 관람객을 맞이할 필요가 없었다. 우리가 콘셉트로 추구했던 더 가까운 대화와, 책으로 오롯이 시선을 끌어오는 일 역시 Bookfair Kit여서 가능했다.

책을 120*60에 모두 눕히기만 했으면 아쉬웠을 텐데 각도가 있는 거치대가 있었던 점도 좋았다. 주력도서를 고정대 위에 올리고 나머지 책들을 평면에 입체적인 느낌을 주었는데, 어떤 부스는 편집자 앞쪽으로 책등이 보이도록 세워놓고, 관람객이 있는 쪽으로 책 표지를 볼 수 있게 누워서 배치하여 자체적으로도 입체감을 주었고, 오히려 촘촘한 디스플레이가 ‘이 북페어는 알차다’라는 느낌을 받도록 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규격화된 디자인의 간결함과 한칸의 서포트
참가 출판사들이 디자인에 부담을 갖지 않도록 모든 컨텐츠를 규격화하고 사무국에서 직접 제작해 배치했다. Bookfair Kit에 들어가는 내용물도 A3로 규격화되어 있었고, DP Friends_WallZ나 DP Friends_Box1, 또 Walls에 부착할 현수막 사이즈가 미리 정해져 있어 고민할 필요가 없는 것이 편하고 좋았다. 다만 DP Friends_WallZ를 안쪽이 아닌 바깥쪽 면을 사용해야 했기 때문에 현수막을 테이프로 부착할 수밖에 없었는데, 미리 알았으면 좀더 크게 만들걸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
사실 가장 고민되는 것은 공간 배치였다. 9.5*11m 정도 되는 공간에 16개의 부스를 배치하는 것, 사이에 얼마만큼의 공간이 필요한지 가늠하기란 쉽지 않았다. 한칸의 존재는 이런 공간을 구성하고 꾸며 본 경험이 없는 우리가 ‘북페어를 위해 제작된 가구’라는 큰 요소들을 배치함으로써 공간의 ‘느좋’ 바이브를 연출하는 부담을 확실히 줄여주었다. 공간의 구성을 잘 아는 사람이 함께한다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편안했다. 함께 설계하고 꾸며나가는 것은 사무국에도 기분 좋은 경험이었다.

아쉬운 점
16 팀이라는 적은 수의 참가사를 모집하고 전체 인원을 90명 정도로 제한했지만 공간이 다소 붐비게 느껴졌다는 점은 다소 아쉽다. 부스 사이 여유 공간이 부족해서 한 부스 앞에 서너 명 이상이 서 있는 경우에는 추가 고객의 접근이 거의 불가했다. 공간 답사를 하며 한칸 대표님과 나눴던 대화가 계속 기억에 남는다. 좋은 자리에 사람들이 머물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말. 그래서 접견실에 설치된 바테이블을 활용해 앉아서 머물며 행사를 돌아볼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한 것은 신의 한 수였다. 그럼에도 더 많은 ‘머묾’의 공간이 필요하다는 피드백도 있었다.
우리에게 다음이 있을까?
사실 이번 디스이즈텍스트는 서로의 호의가 없으면 진행되지 않았을 것 같다. 모든 것이 불확실한 처음, 사무국도 그냥 한번 해 보자 라는 마음으로 각자가 가진 시간과 역량을 다 끌어내서 작업했고, 참가사들도 취지에 공감하며 신청해 주셨고, 후원사들도 선뜻 손을 잡아주었다. 관람객들도 애써 시간 맞춰 예약하고, 현장에 와서 줄 서고 또 책을 많이 구매하셨다. 여러 요소가 서로 다 잘 맞물려서 가능했던 것이었는데, 이제 이것이 지속되기 위해서는 서로 조금 더 다른 수준의 부담을 져야 할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고 얻은 기쁨이, 서로가 사라지지 않도록 조금 더 마음과 힘을 내어 줄 힘이 되었을 것이라 믿는다.
글: 김미선 (디스이즈텍스트 사무국장, 이김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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