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인들의 겨울은 10월에 시작된다
여름보다 곱절 이상 해가 짧은 계절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위스인들이 겨울을 기다리는 이유는 크리스마스 때문이다. 스위스는 핼러윈데이 무렵부터 상점마다 크리스마스를 위한 초콜릿과 퐁듀, 라끌렛 치즈, 쿠키 등이 가득 차 있다. 그중에서도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다름 아닌 제과제빵을 위한 진열대이다.
산더미처럼 쌓여있는 밀가루와 설탕, 그리고 서울의 방산시장에나 가야 볼 법한 다양한 종류의 제과제빵 재료들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뿐만 아니라 거리 곳곳은 핼러윈데이 장식과 크리스마스 전구들이 뒤섞여 반짝인다. 10월의 마지막 밤, 온갖 핼러윈 귀신 장식이 즐비한 가운데 예수 탄생을 축하하는 장식들이 혼재되어 있는 진풍경이 펼쳐지고 본격적인 크리스마스 마켓 준비가 시작된다.
겨울이면 또 다른 만남의 장소가 되는 유럽의 크리스마스 마켓
스위스 취리히 중심부이자 취리히 호숫가 바로 옆에 위치한 벨뷰 광장(Bellevueplatz)은 사계절 내내 인파가 북적인다. 서쪽에는 취리히 호수, 남쪽으로는 취리히 오페라 하우스가 있고, 6개 노선의 트램들이 오가며 기차역 또한 가깝기 때문에 취리히를 대표하는 많은 행사들이 개최된다.
1856년부터 취리히의 대표적인 광장 역할을 한 이 곳에서는 450년 전통의 취리히 상인 길드들의 젝스로이텐(Sechseläuten)이라는 봄 행사를 시작으로 초대형 천막에서 열리는 서커스, 야외 오페라 및 콘서트, 영화 등을 상영하는 오픈에어, 스트릿 퍼레이드, 취리히필름페스티벌 등의 이벤트들이 계절에 따라 연이어 열리고 겨울에는 이 광장의 메인 행사인 취리히 크리스마스 마켓이 열린다.
벨뷰광장에서 열리는 취리히 크리스마스 마켓은 일 년 중 4주 이상 열리는 장기 행사로 이곳 광장에서 열리는 행사 중, 가장 오랜 기간 개최되며 대부분 11월에 개장하여 크리스마스이브 이전에 폐장한다.
이 기간의 취리히에서는 취리히 중앙역이나 그로스 뮌스터 성당 앞 등 도심 속 크고 작은 여러 장소에서 크리스마스 마켓을 만날 수 있는데 이곳 벨뷰 광장에서 열리는 마켓의 규모가 가장 크다. 매년 120여팀 이상의 참여팀들과 600명 이상의 직원들이 참여하고 있으며 152만명의 취리히 인구 중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90만명의 방문객이 매년 이 크리스마스 마켓에 찾는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오전 11시 부터 자정까지, 비가 오거나 눈이 오더라도 크리스마스 마켓은 언제나 인산인해이다.
5년 마다 색다른 기다림이 있는 크리스마스 마켓
7년 전인 2016년, 처음 스위스에 왔을 때 방문했던 벨뷰 광장의 크리스마스 마켓은 지금과는 조금 다른 방식과 컨셉이었다. 팬데믹과 지속가능성을 모토로 하는 시대 흐름의 영향도 있었겠지만 그것들을 감안하고도 이전과는 눈에 띌만큼 변화한 이유는 따로 있었다. 취리히의 최대 일간지 NZZ(Neue Zürcher Zeitung)의 기사에 따르면 2014년 부터 설정된 시의 새로운 지침*으로 취리히시와 앞서 언급한 취리히 상인 길드가 5년 마다 크리스마스 마켓을 이끌어 갈 업체를 입찰 방식으로 선정하는 데에 있었다.
*2014년 이전의 크리스마스 마켓은 취리히 상인 길드 중심으로 운영되어 왔지만 2011년 공공 토지 사용에 관한 규정이 개편되고 공개 입찰 방식으로 변경되었다.
크리스마스 마켓의 성격상 전통성을 배제할 수 없기 때문에 매년 같은 형태, 음식, 프로그램들이 대부분이라 자칫하면 고루해지기 쉽다. 하지만 5년 마다 한 번씩 입찰 방식으로 업체를 선정하는 시스템으로 크리스마스 마켓의 개념을 다시 정리할 수 있게 된 계기가 된 것 같다. 운 좋게도 두 개 입찰 업체의 크리스마스 마켓을 경험하게 됐고 기존과는 눈에 띄게 다른 방식에 신선함을 느꼈다.
붐비는 인파 속에서 보이지 않는 동선을 확보하다
크리스마스 시즌의 상점들과 거리는 보기만 해도 심장이 두근거릴 만큼 활기차고 낭만적이다. 2023년 벨뷰 광장의 취리히 크리스마스 마켓 스탠드는 뾰족한 지붕을 얹은 오두막과 같은 모양이다. 지붕에 빨간색 페인트칠을 한 오두막들은 추운 날씨에도 끄떡없이 단단하게 지어지는데 합판과 통나무 등으로 지어졌으며 설치 기간만 열흘 이상이 소요된다. 취리히 크리스마스 마켓에 설치되는 오두막들은 입찰 업체의 디자이너들에 의해 직접 제작한 오두막으로 이웃나라의 크리스마스 마켓 스탠드와는 차이가 있었다.
오두막은 참여한 팀들의 성격에 따라 크게 세가지 형태로 구성되어 있다.
1)방문자가 오두막 안으로 진입이 가능한 쇼룸 형태의 오두막은 의류나 악세사리류 등을 판매한다.
2)진입이 불가한 형태의 경우엔 방문자의 눈 높이를 고려한 진열 방식을 택했다. 진열된 제품들을 보기 위해 고개를 숙이거나 자세를 낮출 필요가 없는 계단형 진열 또는 사선형 진열 방식이다. 음식을 판매하는 오두막의 경우 방문자의 진입은 불가한 형태로 냉장고, 화구, 환기구, 조리대가 포함된 완벽한 주방 시스템으로 연출되어 있었다. 보통 판매하는 음식들은 조리도구 및 환경 등으로 쉽게 유추가 가능한 메뉴들이며 굳이 어떤 음식인지 설명하지 않아도 조리 과정에서 확인할 수 있는 시스템이 많았다.
3)나머지 대형 오두막들은 보통 방문자들이 음식을 먹거나 쉴 수 있는 휴게 공간으로 평균 방문객 수에 비해 앉을 수 있는 휴게 공간은 굉장히 협소하지만 방문자들이 대게 앉아 있기 보다는 걸어 다니며 식음료를 즐기기 때문에 오히려 의자가 비어 있는 경우가 많다.
또한 입장료가 별도로 없는 행사이다 보니 특정 입구가 정해져 있지 않고 동서남북 어느 방향이든 원하는 곳으로 진출입을 하더라도 구석구석 놓치지 않고 모두 볼 수 있는 동선으로 오두막들이 설치되어 있다. 오두막끼리 등을 맞대어 설치되거나 오두막의 뒷면에 휴게 공간이 설치 되어 방문자들이 오두막의 뒷면을 볼 수 없는 구조로 연출된 것도 큰 특징 중에 하나인데 마켓 외부를 향해 줄지어 설치 된 오두막들은 크리스마스 마켓 내부를 덜 붐비게 할 뿐 아니라 울타리나 담벼락의 역할을 대신하기도 한다. 그래서 한참을 구경하다보면 분명 내부로 진입했지만 어느새 마켓 외부를 걷고 있는 나를 발견하기도 한다. 이런 뫼비우스띠 형태의 구조 덕분에 일시적으로 방문객이 몰리더라도 큰 사고를 막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공간 자체는 높낮이의 변화가 없는 광활한 광장이지만 한시적으로 운영하는 퐁듀 샬레(Fondue chalet), 어린이들을 위한 인형 극장, DJ 파빌리온 등의 간이로 세운 대형 오두막 위에 넓은 규모의 테라스를 설치하여 크리스마스 마켓 풍경을 한 눈에 감상할 수 있는 뷰포인트를 여러 방향으로 연출한 것도 이색적이다. 물론 이러한 뷰포인트는 휠체어 및 유아차 접근이 용이하게끔 경사로가 설치되어있으며 모든 뷰포인트 일층에는 화장실이 마련되어 있어 어디서든 쉽게 화장실을 발견할 수 있다. 방문객들의 민첩한 회전을 위해 더 많은 공간을 확보하려는 다양한 노력은 뷰포인트 뿐만이 아니다. 길게 줄을 설 필요가 없어 인파가 적은 오두막 근처에 회전목마를 설치하여 낭만적인 분위기를 연출하면서도 특정 스팟에 인파가 몰리는 것을 방지하기도 했다. 이전의 크리스마스 마켓에서는 회전목마 자리에 아이스링크가 설치되었었다.
전세계인들이 즐기는 크리스마스 마켓
크리스마스 마켓 투어의 시작은 언제나 글뤼바인(Glüwein)과 함께한다. 글뤼바인(Glüwein)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뱅쇼(Vin chaud)의 독일식 명칭이다. 건과일과 향신료를 넣어 따뜻하게 데운 크리스마스 대표 와인인 글뤼바인을 손에 들고 본격적으로 마켓에 입장하면 오감을 사로잡는 다양한 음식들을 만나게 된다.
작은 오두막의 한쪽 벽면을 열어 커다란 나무 화덕을 연결한 피자 상인부터 족히 300개 이상의 소시지를 동시에 구워낼 수 있는 크기의 그릴을 준비한 소시지 상인, 추운 겨울에도 민소매 옷차림으로 벨기에식 감자튀김을 튀겨내는 상인, 보는 것만으로도 당이 충전될 만큼 달달해 보이는 디저트 파는 상인까지. 취리히 크리스마스 마켓을 한 바퀴 돌면 전 세계의 대표 음식들을 한자리에서 맛볼 수 있다.
취리히 크리스마스 마켓이 이전의 크리스마스 마켓이나 이웃 국가들의 마켓과 크게 다른 점이 있다면 반드시 크리스마스 시즌이 아니어도 접할 수 있는 선택의 폭이 넓어졌다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크리스마스 마켓>과 <푸드 페스티벌>의 경계가 애매해지기도 했지만 다양하고 입체적인 시도로 취리히 크리스마스 마켓만의 매력을 살려보는 것 또한 좋은 의도라고 생각한다. 음식 뿐만 아니라 크리스마스트리를 장식할 아름답고 반짝이는 오너먼트, 장신구 및 방한 용품, 스위스 예술가들이 만든 공예품 그리고 스위스 국민 브랜드 프라이탁(FREITAG) 팝업 스토어와 같은 스위스 자체 브랜드 오두막들도 만날 수 있다.
지난해 벨뷰 광장에서 열리는 크리스마스 마켓을 주관한 입찰 업체 <WIENACHSDORF>는 2023년 한 해, 400여개의 마켓 셀러 지원서를 받았으며 모집하고자 했던 셀러의 약 4배 만큼의 팀이 지원해 선정하는 과정이 길고 복잡했다고 전했다. 셀러 선정시 참여하고자 하는 셀러에게 명확한 시그니처가 있고 공정한 조건에서 지속 가능한 원자재로 제품을 생산하는지에 대한 부분을 염두했으며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하게 여긴 부분은 마켓의 분위기를 헤치지 않고 소규모 시리즈의 소중함을 우선으로 여기는 셀러들을 중심으로 선정했다고 한다.
진화 중인 크리스마스 마켓
팬데믹 이후 취리히 크리스마스 마켓에 생긴 가장 큰 변화는 다름 아닌 비접촉식 결제 방법이다. 현금 결제가 필수였던 과거와는 달리 모든 결제 방식에서 카드 결제가 가능하게 됐다. 여전히 도어락보다 열쇠를 사용하고, 온라인 쇼핑이나 음식 배달 문화에 이제 막 눈을 뜬 스위스에서 크리스마스 마켓의 카드 결제 방법은 가장 큰 변화라고 볼 수 있다. 단순히 결제 방식에만 변화가 있는 것은 아니다. 모든 마켓 상인들이 재사용 식기나 컵 등을 사용하게 되었다. 마켓에서 판매되는 음식들은 재사용 용기에 담기고 소비자는 음식이나 음료 구매 시 식기 보증금을 포함하여 결제하는 방식으로 변화하였다. 변경된 방식은 마켓의 분위기마저 바꿔놓았다.
식기 보증금 반환 구역이 생기다 보니 각 오두막마다 비치되어 있던 쓰레기통의 수가 상대적으로 감소하였고 이전보다 깨끗한 분위기로 변화하였다. 식기 보증금 또한 해당 식기에 해당하는 금액을 비접촉식으로 결제 취소가 가능하게 됐다. 한마디로 전염병이 만들어 낸 좋은 변화이자 진화인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프랑스나 독일의 크리스마스 마켓은 현금 결제가 주를 이루고, 재활용 식기가 아닌 종이로 만들어진 친환경 식기를 사용하고 있는 터라 가깝고도 멀게 느껴졌다. 오랜 역사의 전통적인 크리스마스 마켓의 보전에는 때론 시대적인 변화도 필요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크리스마스 마켓
매년 돌아오는 크리스마스에도 여전히 설렐 수 있다는 것은 어쩌면 사람 때문이다. 사람들이 모여 작은 오두막이 생기고 오두막들이 모여 군락을 이루고 마켓이 되었다. 마켓을 중심으로 문화가 만들어지고 이것들은 역사가 되기도 한다. 몇 세기가 지나도 크리스마스를 사랑하는 이유는 어쩌면 이 작은 오두막의 힘일지도 모른다.
일 년 전의 약속, 혹은 수십 년 전부터 오랫동안 지켜온 만남의 약속들이 이루어지며 무사히 보낸 일 년을 정리할 수 있는 크리스마스 마켓. 그래서 나는 올해도 크리스마스 마켓을 기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