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당은 단순한 땅 위의 공간을 넘어, 가족과 이웃, 지역사회 소통의 장으로 여겨지며 오랜 세월 동안 인간의 삶과 문화에 깊은 흔적을 남긴 공간이다. 한국의 마당은 풍물패 노는 무대이자 혼례와 같은 각종 집안 잔치가 열리는 곳이며, 서양 문화에서 마당을 의미하는 ‘garden’, ‘courtyard’ 또한 가든파티와 바비큐 등 가족과 이웃들이 모여 생활하고 소통하는 공간으로 활용되었다. 동양과 서양의 마당 모두 공동체 의식, 문화적 교류, 휴식의 공간으로서 역할을 해 온 것이다.
현대에 이르러 아파트, 빌라 등의 주거 형태에 익숙해진 한국인에게 마당이란 개념은 멀어진 과거의 이야기로 들리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에게 낯설어진 개념을 현시대의 커뮤니티 문화로 만들어 가는 이들이 있다. 예술가를 나의 이웃처럼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일상적으로 주어진다면 우리의 삶은 어떻게 변화할까?
예술가들의 집, 콜링우드 야즈
현재 호주 예술계는 여러 도전과 기회 앞에 서있다. 코로나-19 팬데믹의 여파로 국경 폐쇄, 사회적 거리 두기 등 예술 및 문화 활동에 여러 제약이 따랐고 많은 예술가와 문화 기관이 경제적 어려움을 겪었다. 국경 봉쇄가 풀리고 일상으로의 복귀를 꿈꾼 것도 잠시 부동산 시장의 변화는 또 다른 역경을 불러왔다. 예술가들이 안정적으로 창작 활동을 이어나갈 수 있는 공간이 이전보다 더 줄어들게 된 것이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예술가들에게 큰 힘이 되는 공간이 있다. ‘콜링우드 야즈collingwood yards’는 호주 멜버른 콜링우드 지역에 위치한 문화 예술 공간으로, 2021년 3월에 문을 열었다. 2014년에 설립된 비영리 단체 ‘Contemporary Arts Precincts Ltd’가 2005년 문을 닫은 뒤 10여 년간 잠들어있던 옛 주립 기술 전문 대학 TAFE의 부지 소유권을 얻었고 이후 자선단체, 정부 및 민간 기업의 투자를 받아 예술가, 창작자, 지역 사회를 지원하고 지속 가능한 창작 활동을 위한 환경을 제공하는 공간으로 탈바꿈시켰다. 이들은 예술가와 창작자가 가진 다양성을 지키고 예술의 사회 참여를 촉진하는 데에는 공간적 지원이 핵심이라 믿는다.
다양한 크기와 형태의 작업실, 전시 공간, 예술 프로덕션 시설 등을 포함한 이 오래된 재생 건물에 여러 분야의 예술가, 디자이너, 각종 비영리 단체가 둥지를 틀었다. 그뿐만 아니라 바bar, 카페, 베이커리, 예술서점, 레코드숍과 같이 누구나 이용할 수 있는 리테일숍들이 문을 열었고 지역 커뮤니티의 발전에 기여하기 위한 워크숍 프로그램도 운영하고 있다.
콜링우드 야즈collingwood yards의 가장 큰 장점은 그 이름에 걸맞은 넓은 마당이다. 건물에 빙 둘러싸인 직사각형 마당 중앙에는 플라타너스 세 그루가 커다란 그늘을 만들어 이곳에 머무는 모든 이들에게 편히 쉴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해준다. 최근 한국에서 불필요한 소비 없이도 사람들과 어울릴 수 있는 공공의 공간, 공원 및 녹지대가 부족하다는 이야기가 종종 들려온다. 그런 의미에서 콜링우드 야즈collingwood yards의 마당은 빈 공간이 주는 여유와 누구나 환영 받는 열린 공간 존재의 필요성을 깨닫게 해준다.
마켓, 말랑한 공동체를 이루는 힘
콜링우드 야즈collingwood yards의 공동 작업 공간이자 예술가들의 커뮤니티인 ‘스테이 소프트 스튜디오Stay Soft Studio’는 그래픽 디자이너, 3D 아티스트, 영상 스튜디오, 앱 개발자, 플로리스트, 타투이스트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들이 정기적으로 운영하는 나이트 마켓은 일종의 지역 축제이다. 콜링우드 야즈collingwood yards의 마당을 배경으로 매달 셋째 주 토요일, 오후 두 시부터 밤 아홉 시 까지 마켓이 열린다. 독립 디자이너, 예술가를 비롯한 모든 종류의 창작자와 수집가를 가리지 않고 스테이 소프트 스튜디오Stay Soft Studio 공간 한켠에서 팝업을 운영할 타투 아티스트도 모집한다.
50여 팀의 마켓 참가자에게는 2x2m 또는 4x4m 공간이 할당 된다. 모든 기물은 ‘BYObring your own’로 운영되기 때문에 행거, 테이블, 조명 등은 따로 제공하지 않는다. 주최 측 부스를 제외한 모든 것은 참여자가 가져왔다가 다시 가져가는 형식이다. 화려한 부스 장식도 입간판도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비슷비슷한 테이블과 행거 사이로 참가자의 개성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이곳에서는 참가자들을 아티스트도, 크레이터도 아닌 좌판 장수, 노점상을 뜻하는 스툴 홀더stall holders라 칭한다. 어딘가 투박함이 느껴지는 명칭에서 저마다 다른 색깔을 지닌 사람들 모두를 포용하려는 의지가 엿보인다.
마켓의 분위기는 소박하고 자유롭다. 오픈 한 시간 전, 빈티지 제품을 취급하는 셀러들과 디자이너 의류 브랜드가 가장 먼저 도착해 옷걸이에 차례로 옷을 걸기 시작한다. 1시 30분경이 되면 스테이 소프트 스튜디오Stay Soft Studio의 메인 부스에서 음악이 흘러나오기 시작한다. 콜링우드 야즈collingwood yards에 소속된 바bar&라디오 방송국 ‘호프 스트리트 라디오Hope st radio’의 라이브 방송이다.
나무 그늘 아래 늘어선 다양한 빈티지 제품과 수공예품, 예술 작품을 둘러보고 있으면 창작자, 판매자들이 자연스레 말을 건네온다. 가볍게 건네는 인사 ‘How are you?’로 시작되는 대화는 브랜드와 제품에 대한 설명에서 그치지 않고 사적인 대화로 이어진다. 참으로 호주다운 풍경이다.
손 그림이 돋보이는 도자기 잔은 ‘쓰루 굿 포터리throughgood pottery’의 제품이다. ‘May’로 알려진 아린랏 손캄Arinrat Sornkam은 2020년부터 노스 멜버른을 중심으로 활동해 온 도예가로, 노스 멜버른에 위치한 태국식 카페 우돔 하우스udom house에서 처음 그녀의 도자기를 만났다. 마켓에는 새로운 창작자를 알아 가는 것만큼 초면인 듯, 초면이 아닌 듯 눈에 익은 제품, 한 번쯤 들어본 브랜드를 발견하는 즐거움이 기다리고 있다. 더불어, 즐겨 찾는 카페, 함께 공유하는 지역문화는 언제나 좋은 이야깃거리가 된다.
대화를 나누는 사람들의 손에는 언제나 술잔이 들려있어 흡사 누군가의 파티에 와 있는 기분마저 든다. 맥주잔과 와인잔이 제품들과 한데 뒤엉겨있기 일쑤이다. 건물 안의 가게들은 여전히 영업 중이고 시간이 지날수록 마켓 안으로 녹아들어 그 경계가 조금씩 흐려진다. 술기운에 팝업으로 운영 중인 타투 스튜디오로 들어가는 사람들이 종종 눈에 띈다.
계단 아래쪽에는 공연 무대가 있고 그 옆으로는 식음료 부스가 늘어서 있다. 여름이면 조조스Jojo’s의 과일 아이스크림이 더위에 지친 사람들을 달래준다. 건강하고 맛있는 핫소스와 각종 양념을 취급하는 ‘케이팅앤코Keating and co’ 부스에서 만드는 투박한 모양새의 핫도그를 구매하면 다양한 로컬 핫소스를 원하는 만큼 맛볼 수 있다. 마당 안쪽에 위치한 스테이 소프트 스튜디오Stay Soft Studio의 메인 부스와 바bar 호프 스트리트 라디오Hope st radio에서는 로컬 와인과 맥주를 판매한다. 사람들은 공연 무대 앞 계단에 앉아 먹고 마시며 느긋하게 시간을 보낸다. 이곳은 어린이와 반려동물에게도 언제나 즐거운 놀이터가 된다.
서로를 연결하는 손짓
오래된 학교 건물은 예술가들의 집이 되었고 그들의 마당은 사람들이 모여 유대감을 형성하고 지역사회를 강화하는 공간이 되었다. 스테이 소프트 나이트 마켓Stay Soft ngiht market은 이름 그대로 사람들을 예술가들의 보금자리로 맞이하는 부드러운 손짓이다. 포토월 앞에서의 요란한 인증 사진도, 반짝 기분 좋은 기념품도 없지만 그날 나눈 대화, 공들여 고른 작은 물건 하나로 기억되는 시간은 우리 곁에 오래도록 남는다.
이와 같은 일상 속 예술적 실천의 힘은 작은 마당에서 시작되어 지역 전체로 번져 나갈 것이다. 마켓으로 한층 깊어진 소통의 장에서 우리는 우리 주위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서로 연결되어 세상을 넓힐 기회를 마주한다. 그렇게 넓어진 세상에는 소외되는 사람 없이 모두가 환영받고 모두가 이웃이 되는 삶이 있기를 꿈꿔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