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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 구석구석에서 디자인 행사가 열리면 어떤 모습일까요?

방콕 도시 전역에서 열리는 디자인 행사는 어떻게 만들어졌을까요? 2024 방콕디자인위크 ‘Liveable Scape(살만한 풍경’을 3가지 측면으로 나누어 인사이트를 공유합니다. 첫 번째는 ‘방콕시티’, 태국 창조&디자인 센터(TCDC)를 기점으로 기업, 아티스트, 지역주민이 각자의 관점과 방법으로 풀어낸 도시 방콕과 만난 디자인이 이야기하고자 하는 살만한 풍경을 만나봅니다.

by 노성일
2024.05.22

태국은 동남아시아에서 유일하게 서양 제국주의 국가의 식민 지배를 받지 않았고 근래에 내전도 겪지 않았다. 활발한 무역항이었던 방콕에는 중국인, 아랍인, 인도인 등 각지에서 온 상인들이 형성한 커뮤니티가 수백 년 전부터 지금까지 도시를 활성화하고 있다. 그래서인지 백 년도 더 넘는 세월을 간직한 수많은 상점의 바로 옆에 들어선 세련된 미감의 고층 건물들이 한데 섞여 도시 풍경을 다채롭게 한다. 이런 방콕 거리를 걷고 있노라면, 오랜 평화의 시기 동안 과거와 현재, 미래의 다양한 삶이 뿜어내는 즐거움을 발견할 수 있다.  

방콕디자인위크의 시작, TCDC에 대해 먼저 알고 가자

최근 가파른 경제 성장, 고양된 시민 의식과 함께, 산업 증진을 위한 창조적인 전략, 특히 디자인과 미학적 관점의 필요성이 태국에서 매우 활발히 논의되고 있다. 이러한 논의는 태국의 주요 세 도시 방콕, 치앙마이, 콘캔에 자리 잡은 TCDC(Thailand Creative & Design Center)를 중심으로 다양한 전시와 연계 프로그램을 진행해 발전시키고 있다. TCDC는 태국의 창의 산업(Creative Industries)을 주도하는 공공기관인 창조경제청(CEA, Creative Economy Agency)이 운영하며, 본부 역할로 BKKDW를 주도하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방콕 TCDC는 방콕 중앙우체국 건물을 함께 사용하고 있다. ⓒSungil Noh

방콕 TCDC는 방콕 중앙우체국 건물 내 자리 잡고 있고, 5개의 층마다 예술 도서관, 메이커 스페이스, 소재 아카이브, 전시 공간 등이 꾸며져 있어, 창조적인 일을 하는 사람들이 언제든 찾아와 즐길 거리가 풍성하다. 평소에는 등록 절차를 거쳐 출입이 가능하지만, BKKDW 기간 동안 시민들에게 모두 개방한다.  또한, 앞마당에는 로컬 F&B 부스와 기업 홍보 부스가 설치되어 있다. F&B부스는 오전 11시부터 밤 10시까지 행사 기간에 상시 열려 있고, 30여 개로 종류가 다양하다. 지붕과 기둥으로 구성된 부스는 모두 나무에 흰색 페인트로 칠했고, 가스, 전자제품, 전등을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도록 전기 설비에 대한 지원이 잘 갖춰져 있었다. 

TCDC 앞마당에 설치된 로컬F&B부스 ⓒSungil Noh

기업 | 광고를 위한 파빌리온을 참여의 장소로 

다양한 기업들이 행사의 주제에 어울리는 테마로 세련된 파빌리온을 만들고 실시간으로 시민들의 의견을 듣거나 참여자를 예약받아 워크숍을 진행하고 있었다. 사진 찍기 좋게 세련된 공간을 꾸며 놓은 것과 동시에 흥미롭게 참여하고 결과물을 가져갈 수 있도록 다양한 체험을 준비해 두었다. 파빌리온 안에서 사진을 찍어 각자의 소셜 미디어에 공유하는 청년들을 자주 보였고, 언제나 예약이 꽉 차 있을 정도로 워크숍 인기가 좋았다. 태국 청년들의 소셜 미디어 이용량은 다른 나라의 그것과 비교했을 때 매우 높은 편에 속한다. 문화예술 행사가 열리면 어디든 많은 인파가 방문하여 축제와 콘텐츠를 즐기고 또 자신의 선호도와 삶을 공유하는 문화가 잘 형성되어 있다. 이런 태국의 문화 현상을 고려한다면, 세련된 파빌리온을 운영하는 것은 시민들의 기업 친화도, 브랜드 인지도를 높이는 지점에서 좋은 전략으로 보였다. 

부동산 개발기업 AP Thailand의 파빌리온 ⓒSungil Noh

AP 워크숍은 살기 좋은 도시를 위한 질문에 시민이 답을 하고, 그에 매칭되는 식물을 꽃꽂이 해가는 과정으로 구성되었다 ⓒSungil Noh

그 중 ‘One Bangkok’에서 구성한 파빌리온은 낮에는 홍보관으로, 밤에는 컬러풀한 공연장으로 바뀌어 방문한 이들의 또 다른 즐거움을 마련해주었다. 공연 등 프로그램이 저녁 10시까지 진행되고 F&B 부스가 해가 지면 화려한 야시장으로 바뀌도록 기획해 사람들이 먹거리와 즐길 거리가 있는 이곳에 계속해서 머무를 수 있도록 구성한 것이 눈에 띄었다.

공연장과 야시장으로 탈바꿈한 One Bangkok 파빌리온과 F&B 부스 ⓒSungil Noh

아티스트 | 공예와 디자인 아카이브 공간에서 전시장으로 

TCDC는 예술 도서관, 메이커 스페이스, 소재 아카이브(Material Archive), 전시 공간 등으로 구성되어 있어 창조적인 일을 하는 사람들이 언제든 찾아와 즐길 거리가 풍성하다. TCDC 내 예술 도서관에서는 ‘태국 공예의 미래’라는 제목으로 전통을 현대적으로 해석한 여러 스튜디오의 제품들이 소개되었다. 이 예술 도서관은 평소 디자이너들이 전 세계에서 모인 레퍼런스를 보기 위해 자주 방문하는 곳이다. 그 공간이 이제는 레퍼런스를 보고 성장해 온 아티스트의 작품을 소개하는 전시장으로 바뀌었다는 점이 흥미로웠다.   

 

(위) 부스 전경, (아래 셋) 부스 디테일  ⓒSungil Noh

그중 재미있는 아이디어가 돋보였던 것은 선튜디오Suntudio의 작품이다. 방콕을 어지럽히는 악의 무리와 싸우는 히어로 만화 ‘방콕 키퍼스Bangkok Keepers’는 방콕에서 흔하게 만날 수 있는 평범한 청소부, 뚫어뻥 맨, 변신하는 방콕 버스 등을 영웅으로 등장시켜 현지의 이슈를 유머러스하게 풀어냈다. 이 작품이 특히 인상적이었던 이유는 여태까지 ‘태국스러움' 혹은 도시 ‘방콕'의 이미지가 전통 문양이나 춤사위, 오래된 사원의 종교적인 이미지에 갇혀 있지 않은지 내게 질문을 던지는 콘텐츠였기 때문이다. 동남아시아 콘텐츠를 개발하며 태국을 잘 안다고 생각했던 나조차도 BKKDW을 둘러보기 전 어렴풋하게 떠올렸던 ‘방콕'의 이미지는 전통적이었다. 이 작품을 시작으로 다양한 각도에서 도시를 새롭게 조명하는 콘텐츠를 많이 발견하게 되었다.

 

Bangkok Keepers by Suntudio ⓒSungil Noh

아티스트 | 옛 수로를 미술 작품으로 재해석하다

방콕은 오래전부터 잘 정비된 운하를 통해 곳곳을 다닐 수 있는 도시였다. 그러나 도시가 현대화되면서 여러 수로가 막히고 자동차를 위한 도로의 사용이 늘어나면서 수로는 상당수 그 기능을 잃게 되었고, 남아있는 수로는 물이 고이고 쓰레기가 쌓여가 수질오염 등 이슈로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차이나타운 어귀의 더 코너하우스The Corner House 앞 물 위에서 지나가는 시민들과 관람객들을 맞이하는 작품이 설치됐다. 바로 런던과 베를린 기반의 아케인 스튜디오Arcane Studio의 ‘넥서스 Nexus’라는 작품이다. 그들은 시민들이 오가다 잠시 멈춰 낮과 밤으로 달라지는 수변 풍경을 감상하기를 바랐다고 한다. 또한, 교통로의 기능을 상실한 수로를 새로운 관점에서 바라보고, 방콕이라는 도시의 특수성 안에서 물의 소중함을 일깨우고자 하는 목적을 가지고 있다고도 했다. 주변 환경과 잘 어울리는 색과 조명을 이용해 눈에 띄고 사진찍기 좋은 구도에 일부러 설치한 포인트가 인상적이었다. 누군가에게는 잊혀진 감각을 되살리고 누군가에게는 새로운 감각을 불어넣는 기획, 다시 말하자면 방콕이라는 도시의 역사적, 사회적 맥락을 이해하여 교감의 다리를 놓은 누군가의 고민이 있었기에 이 수로라는 장소가 특별하게 다가온 것 아닐지 생각해본다. 

 

운하에 설치된 Nexus의 낮과 밤 ⓒSungil Noh

시민 | 마을 축제를 왜 디자인위크에 포함했을까

방콕 후알람퐁 Hua Lamphong 중앙역은 서울역을 떠올리면 상상하기 쉬울 것이다. 오랜 세월을 거쳐 역 주변에 자연스럽게 형성된 지역 거주민들의 삶이 켜켜이 쌓여 있다. 후알람퐁 지역에서 진행된 BKKDW 프로그램은 주민들의 삶을 그대로 보여주는 사진전, 지역의 비어 있는 공간에서 ‘점괘'를 주제로 불안한 미래를 예측해 보는 현대미술 전시, 철공소와 용접공장이 많은 지역 특징을 이용한 철공 조형물 등으로 채워졌다. 그중 디자인 위크 프로그램으로 생각지 못한 현장이 있었다. 기찻길 옆 도로 100미터를 차 없는 거리로 만들어 주민들이 직접 공간을 기획하고 만든 먹거리 장터, 체험존, 놀이터, 워크숍 존으로 구성된 마을 축제였다. 

기찻길 옆 마을, 후알람퐁 지역 마을 축제 장면. 축제의 Zone을 나타내는 박스(왼쪽)와 돗자리를 깔고 워크숍이 열렸다.(오른쪽) ⓒSungil Noh

처음에 방콕디자인위크 프로그램이라 생각하지 못한 이유는, ‘디자인'이라면 포스터나 제품 등 매우 세련되고 잘 다듬어진 시각적인 결과물을 떠올렸기 때문이다. 그런데 당시 거리에서 펼쳐지는 장면은 그런 정의와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포장지를 감싼 큰 박스에 풍선과 형형색색 리본을 달아 주민들이 직접 꾸민 팻말은 다양한 컬러만큼이나 선명한 존재감을 뿜어내고, 도로에 펼쳐진 태국 전통 돗자리가 푸드존이 되는 등 디자이너의 시각에서는 전혀 다듬어지지 않은 모양으로 진행되고 있었다. 그렇지만 이 축제는 참여하는 사람들의 눈높이에 맞춰진 친숙함이 주는 따뜻하고 화기애애한 분위기만으로도 충분했던 아닐까? 완벽하지 않더라도 시민들의 적극적인 참여를 통해서 직접 살만한 풍경을 만들어가고 있다는 점에서 디자인위크의 프로그램에 포함된 것으로 생각해 본다. 

아트 존(왼쪽 위) / 모험 존(오른쪽 위) / 축제 입구(아래) ⓒSungil No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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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서 활동하는 디자이너로서 다양한 일을 기획하다 보면, 너무나 빠른 트렌드의 속도와 완성도에 대한 집착이 기획자를 쉽게 지치게 한다는 것을 많이 느낀다. 바라보는 목표가 너무나 전형적이라면, 그 안에 감춘 다양한 생각이 튀어나와 숨 쉴 공간을 마련하기 어렵게 된다. 그런 관점에서 방콕의 살만한 풍경은 내게 많은 질문을 던졌다. 과연 내가 살아가는 도시는, 그리고 서울은 모두에게 살만한 풍경을 이루고 있을까? 시민의 일상 비집고 들어가는 이런 행사와 이벤트들은 그런 창구가 되어 주고 있나? 부족함마저도 즐거운 웃음으로 받아들여 주는 여유가 있을지, 또 다양한 시민들의 목소리를 품을 수 있는 넉넉함이 있을지, 내가 살아가는 풍경을 돌아보게 된다.

 

노성일
에디터 노성일

출판사 소장각을 운영하는 그래픽 디자이너이자 동남아시아 시각 문화 연구자